<가가린> 2020,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
재료를, 소재를 다루는 법
우려했던대로 때깔만 번지르르한 영화..였다. 마치 본즈 앤 올처럼. 영화는 건물인 가가린을 또 다른 주인공으로 삼는다. 다만 영화에서 강조하는 가가린의 모습은 외형적인 부분이 크다. 이 건물이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갖고있지 않다고 하면 가가린을 비추는 그 수많은 미학적인 샷들이 의미를 가지게 될까? 단순히 이쁘다고 문제삼는것이 아니라 진정한 샷의 미학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건물의 외형적인 부분이 형식으로써 내용과 상호작용하고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가가린을 정말 잘 활용한 부분도 있다. 유리의 혼란을 표현했던 틸트샷, 엔딩 시퀀스에서 가가린을 우주선 자체로 상징한 것. 특히 유리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가가린을 우주선으로 보이게 한 씬을 정말 훌륭했다. 그 압도감에 이전의 아쉬운 점이 묻힐 정도로..
영화를 볼 때마다 인물의 동기나 의지가 설명이 안되는 문제점을 많이 느끼는데 이때까지는 그 ‘설명’을 내용적인 측면이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을 한번 더 보고, 박홍열 촬영감독의 스펜서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니 형식이 그 설명의 역할을 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헤어질 결심을 예로 들어보자. 해준이 서래에게 빠지게 되는것에 영화는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첫 만남에서 샷의 길이, 배우의 얼굴에 변형을 주어 설명을 끝낸다. 한순간에 샷사이즈를 크게 컷하면서 해준의 심정을 대변하고, 서브 플롯에서 메인 플롯의 서사를 다룬다. 내용적으로 인물의 욕망을 설명하는것은 도식적이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 어려운 선택이고 위험하지만 가가린을 포함한 많은 영화들이 인물의 욕망을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에게 설득시켜주었으면 한다.
본즈 앤 올을 언급한 이유는 오프닝 시퀀스의 세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며 즐거워하는 씬이 본즈 앤 올에서 티모시가 밴드 음악을 틀며 춤추는 씬과 너무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화면 때깔이 쓸데없이 좋다는 공통점도 있고.. 두 영화의 두씬의 문제점은 너무 노골적으로 관객의 정서’만’을 건드리려 했다는 것이다. 관객이 세 친구의 서사도 모른 채, 심지어 디아나는 한컷 전까지 유리에게 그리 적대적으로 대해놓고 컷 하나 사이에 자전거를 타며 하하호호 하면 무슨 감동이 있단 말인가?(이렇게 인물들의 감정선을 못따라가겠는 문제는 싸가지없던 백인 친구와 갑자기 친해지는 후반 시퀀스에서도 반복된다.)
영화는 우주, 유리 가가린을 매우 소중한 대상으로 여긴다. 주인공인 유리도 주변 친구들과 엄마에게 외면을 받으면서도 그것들을 지키려 한다. 다만 유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이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인 가가린과 우주인 가가린 사이에 어떤 것이 있는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놓았다.
영화는 공간과 그 의미가 확실하게 분리된다. 이것을 활용한 것이 어느정도 보이긴 하지만 더 강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몇몇의 훌륭한 샷도 보였다. 우주 기지를 만든 후 카메라워킹으로 그곳을 진짜 우주처럼 표현한 것(이것도 다른 장소와 워킹에 아예 대비를 주었으면 더 재밌었겠다 하는 아쉬움), 유리가 괴로움을 느낄 때 우주로 잠식되는 것처럼 표현한 것.
때깔만 번지르르한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재수없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쁜 샷을 잡는 것 자체도 노력이 필요할 뿐더러 너무 좋고 신선한 소재들을 갖고 있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