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남녀가 만나서 거리를 걷는다는 설정, 같은 배우, 언어, 계절이 <한여름밤의 판타지아>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다만 <한여름밤의 판타지아>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단절된 이야기라면 <최악의 하루>는 플롯이 같은 점에서 시작해 분리되어 평행을 이루다 다시 합쳐진다는 점이다. 두 인물은 변화를 겪기 전 처음 만났다가, 서로가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변화를 겪은 후 다시 재회한다. 영화는 두 주연 간의 플롯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어쩌면 현실)과의 사건을 겪은 두 사람을 그저 엔딩에서 다시 마주치게만 한다. 둘의 관계 안에서 필연적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서사를 가지고 서로에게 작용하게 만든다.
은희는 남자들에게는 밥먹듯이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직업인 연기에 관해서는 감정을 싣지 못한다. 이와세 료는 자신의 소설을 자전적 이야기로 써내기보단 자신과 거리가 먼 인물들로 구성한다. 자신들의 거짓말로 인해 부정적 사건을 겪은 뒤 다시 만난 둘은 한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영어로 서투르게 대화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때보다 진실되어 보인다. 그 대화의 끝엔 진짜 자신의 이야기에서 발화된 소설과 연기에 대한 영감이 있었고, 최악의 하루여서 발견한 최고의 행운을 프레임 너머의 관객에게도 전한다.
마지막에 관객을 바라보며 인물들이 말을 전하는 것이 주제적이고 직설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왜인지 모르게 엄청 감동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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