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소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이렇게 좋을 줄이야... <수라설희>의 장정과 단점은 극명하게 나뉜다. 단점이라면 인물의 내면이 깊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수라의 딸이라는 이유로 (심지어는 복수 대상의 핏줄이다..) 유키는 자신의 평생을 바쳐 복수를 단념한다. 유키의 욕망이 구체화되지 않았고, 영화나 인물에게서 내 삶과 동일한 부분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이 사실은 곧 구조적으로도 탄탄하지 않다는 말이 될 수 있는데 이 또한 맞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나 인물의 내적 변화가 궁금하진 않았다. 다만, 매우 과감한 구도와 카메라워크, 편집, 정서가 직설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들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이런 장르영화에서 어떻게 이런 과감함을 보여줄 수 있는지 정말 놀랍다.. 앵글과 샷사이즈로 연출 요소를 더하는 것은 흔한 방법인 만큼 그 감동도 적다. 하지만 <수라설희>는 샷의 훌륭한 구도 하나로 시각적인 재미요소와 연출적 요소를 모두 가져간다. 그만큼 구도가 정말 훌륭하고 과감하다. (그리고 당시대의 이미지가 이런 과감한 구도를 만난 것이기에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일수도 있다) 과감한 것은 구도뿐만이 아니다. 카메라워크와 편집도이다. 70년대 일본 영화의 이미지가 틸트샷이나 급격한 줌아웃-익스트림 롱샷과 만났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과 신선함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스트림클로즈업을 남발하는 것이 여기서 따온 것이였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재미있는 건 <수라설희>도 쿠엔틴의 클로즈업도 구리지 않다는 것이다. 클로즈업을 하면 어느정도 때깔은 나보이지만 그만큼 흔해보이고 재수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펄프픽션>을 보며 느꼈던 것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매우 세런되게 활용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까지는 모르겠고.. <수라설희>에서는 배우의 얼굴이 익스크림 클로즈업의 이유가 되어준다. 배우의 얼굴, 이미지는 수라설희 그 자체다. 캐릭터를 말하는것도 맞지만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한대로 수라설희는 인물의 내면이나 삶의 애환을 나누기보다는 여자 킬러라, 복수 라는 굵고 강력한 소재, 캐릭터디자인이 돋보이는 영화다. <킬빌>도 똑같지 않은가. 우마 서먼이 빌을 죽이려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애달프게 느껴지는가, 이소룡 옷을 입고 일본도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가? 따라서, 배우의 얼굴(이미지)는 <수라설희>라는 영화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
위 씬도 정말 인상깊었다. <영화의 이해>에서 프레임의 움직임에 대한 파트가 있었는데, 와이드샷에서 인물이 뛰어다니는 것보다 클로즈업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샷의 더 큰 움직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단번에 떠오르는 씬이었다. 유키가 적군들을 휩쓴 뒤에 바닥에 쓰러진 그들을 둘러보는 시점샷과 칼이 몽타주되는 장면인데, 이 시점샷에서부터 다른 소리 없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이 물방울 소리는 칼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큰 소리도 아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칼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이미지는 매우 큰 움직임을 가진다.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과격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장면.
탄탄한 구조도, 삶에 대한 통찰도, 엄청난 영화적 기술도 없는 영화지만 과감함과 정서를 이미지적으로 깔끔하게 표현해낸 몇개의 쇼트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꿋꿋히 해내고 있다. 다시 한번 영화는 학문적으로 대하면 안된다고 느꼈다. 구조만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다. 모단데 없는 적당한 영화가 좋은 영화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와 역할을 다하는 것이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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